>>>>>>>>>>>
44년전, 어느 스물네살 청년의 이야기
Social 2008/05/01 02:23>>>>>>>>>>> >>>>>>>>>>>
일본은 1952년의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을 통하여 세계 제2차 세계대전의 패전국으로 미국을 비롯하여 서구 승전국들에게 전쟁책임을 인정하고 사죄와 배상을 약속한 상태였습니다만, 한국과 중국을 비롯한 아시아 국가들에 대한 침략사실에 대해서는 책임을 인정하기를 거부했고, 당연히 배상문제도 언급되지 못했습니다.
당시 한국 전쟁에 휘말려 있던 한국은 말할 것도 없고 중국 또한 꽤 입장이 매우 곤란한 처지였습니다. 중국 본토에서 쫓겨나 겨우 상임이사국 지위를 유지하던 대만의 국민당과 본토의 중국 공산당 정부 모두 분열로 인해 승전국임에도 제 목소리를 내지 못했습니다. 특히 제2차 국공내전 승리 직후에 한국전쟁에 참전하고 있던 중국 공산당 정부는 당시 국제사회에서 대만의 국민당 정부에 밀려 중국 본토의 공식적인 정부로 인정받지 못하고 있었기에 샌프란시스코 조약에 외교적 항의조차 제대로 못했습니다. 그렇게 일본은 아시아 각국에 대한 전쟁범죄에 대한 부분에서는 면죄부를 받은채로 다시금 국제사회에 편입하게 된 것입니다.
경제개발계획을 추진하고자 했던, 만주 주둔 일본 관동군 소속 장교 출신의 이 대통령은 그에 소요되는 막대한 비용을 충당하기 위해 한일국교정상화를 생각했다고도 전해집니다만 이보다는 또한 동북아시아의 안정과 한일간의 안보협력을 통해 중국과 소련을 견제하는데 골몰했던 미국과 이해관계가 맞았던 것이 더 큰 이유로 보입니다. 사실 1950년의 한국전쟁 발발 이후 공산주의 확산을 막기위한 자본주의 진영의 최후 방어선으로서 한국과 일본이 위치한 극동이 꼽혔고 그런면에서 동북아시아에서 자국 세력의 강화를 추구하는 미국에게 있어서 한국과 일본의 파트너십 구성은 매우 매력적인 부분이었습니다. 미국은 본래 이승만 정권 시절부터 한일 국교수립을 요구했었으나 보수적이나 비타협적 민족주의 경향의 이승만의 강한 반대에 부딪쳐서 답보상태였던 실정이었습니다. 그런만큼 쿠데타로 집권하여 정통성에 큰 약점을 갖고 있었던 당시 한국의 군부출신 신정부의 집권은 미국에게 있어서는 호재나 다름없었지요. 또한 한국전쟁이라는 경제적 호기를 활용하여 54년부터 57년까지 거듭된 진무((神武 )경기를 통해 전쟁의 후유증을 털어내고 고속 성장을 거듭하고 있었던 일본 또한 대규모 상품시장으로서 한국 진출을 간절히 원하고 있었던 실정이기도 했습니다.
이러한 시기 대통령의 지시로 신정부 권력의 핵심이었던 김종필이 전권을 가지고 한일 수교 회담에 나서게 되었습니다. 그는 일본측 대표 오하라와 협상을 진행했는데 예상보다 훨씬 더 양국 간의 이해관계가 엇갈린 탓에 협상은 해를 넘기게 됩니다. 그 중에 가장 갈등이 심했던 분야가 바로 독도 영유권 문제였습니다 .
이 시기 일본으로부터의 어떠한 사과나 배상도 없는 상태로 일제에 의한 식민통치의 불행한 경험을 고스란히 겪은 바 있던 대한민국 국민들은 당시 대한민국 정부의 국교정상화시도를 굴욕외교로 규정짓고 전국민적인 협상 반대운동을 펼칩니다.
1964년 6.3일, 분노한 국민들이 거리로 나섰습니다. 훗날 6.3운동이라고도 불리는 이 대규모 군중집회는 서울 소재 대학생들이 주도하였습니다. 당시 이 운동의 주모자로 지목되어 내란소요죄의 명목으로 체포된 사람들 중에 고려대 상대 학생회장을 맡고 있던 스물 네살의 청년이 있었습니다. 서대문 형무소에서 6개월여를 복역한 이 청년은 징역 3년, 집행유예 5년을 선고받은 후에야 풀려났습니다
그가 감옥을 들락거리는 시기였던 1965년 마침내 한일국교가 수립되었습니다. 대한민국 정부는 모두 무상 3억달러의 "독립축하금"과 경제협력 자금의 명목으로 유상 3억달러, 그리고 2억달러의 상업차관을 알선할 수 있도록 지원받고 일제강점기동안 일본이 조선에게 가했던 모든 피해와 1931년 만주사변으로부터 시작되는 일제의 전쟁기간동안 조선인을 강제동원한 전쟁범죄에 대하여 식민지 침략행위에 대한 어떠한 책임도 묻지 않겠다는 협정문을 체결하게 됩니다. 이는 평화선(어족자원보호선) 철폐, 독도문제 회피, 징용·징병·정신대·원폭 피해자 보상 회피, 징용·징병자의 강제 저축금 반환 불청구, 문화재 반환 포기, 재일동포 법적 지위 보장 포기가 전제된 것이었지요. 그나마 일시불도 아닌 10년 지급에 대한민국 정부는 동의했습니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그나마도 전쟁 혹은 피해 배상금이 아닌 독립축하금의 명목이었다는 것입니다. 어떠한 명목의 공식적 사과 성명도 없었습니다. 그나마 무상 3억달러는 상당부분 현물로 지급된 것이나 다름 없는 것이 경제개발 과정에서 일제 플랜트 등을 독점적으로 도입해야한다는 조건이 포함된 "계약"이었습니다. 이는 3년간 식민통치를 겪었던 필리핀이 일본으로부터 무상으로 5억5천만달러의 전쟁배상금과 2억 5천만 달러의 유상차관을 받아낸 것과 비교하면 엄청난 차이가 있습니다.
한일협정 반대를 외쳤던 그 청년은 당시 이러한 굴욕적인 협상결과를 보면서 무엇을 느꼈을지 아직까지도 궁금하기 그지없습니다. 그로부터 몇 년간 그의 행적은 꽤 정확히 알려져있습니다. 대학을 졸업했지만 시위운동주도 경력으로 그 어떤 곳에서도 취직할 수 없었던 그 청년은 자신의 반정부 운동경력에 대해 스스로 변호하면서 국가 경제발전을 위한 역군으로서 일하겠노라는 강력한 의지를 내보인 청원서를 청와대에 넣었습니다. 당시 대통령이 이 청년을 얼마나 갸륵히 여겼는지는 아직 알 수 없습니다만 아무튼 그러한 과정을 통하여 사회진출이 허용된 이 청년은 건설회사가 주력이던 모 중견기업에 입사하게 됩니다.
여담입니다만 그 때의 청원서를 기억하고 있던 당시 대통령이 이후 청와대를 방문했던 그 중견기업의 오너에게 문득 그의 근황과 안부를 물었다고 합니다. 건설사의 오너는 이 청년을 전혀 모르고 있었으나 청와대에서 돌아온 직후 대한민국 제1의 권력자와 안부를 묻고 지내는 사이로 여겨진 이 청년을 즉각 사장실로 불러올렸다고 하지요. 훗날 입사 5년만에 이사, 12년만에 사장자리에 올랐다는 이 청년의 신화는 여기서 시작됩니다. 지금 그는 자기가 청원서를 보낸 수신지였던 바로 그 집에서 살고 있습니다.
며칠 전의 일입니다. 스물네살의 젊음으로 굴욕적인 한일국교정상화 반대를 외쳤던 바로 그 입이 예순여덟이 되자 "우리가 일본도 용서하는데, 친일 문제는 공과를 균형있게 봐야 한다"라고 했다고 하네요. 사실 그간 한일 역사를 되돌이켜 본다면 우리 쪽에서 아무도 용서한 기억이 없을 뿐더러, 또한 그 쪽에서도 용서를 청한 사례가 없는데 말입니다.
피끓는 청춘이 40년을 넘기면 기억이 가물거릴 수도 있겠습니다. 한 사람의 인간이 40년간 같은 생각과 뜻을 가지고 그 자리에 머문다는 것이 더 현실성이 떨어지는 이야기겠지요, 다만 피끓는 청춘을 바쳐 민족과 조국의 정의를 구현하고자 했던 한 청년이 이처럼 극적으로 변하여 같은 입으로 정반대의 다른 말을 내뱉을 수 있다는 것 또한 20세기 한국 현대사가 가지는 비극 중 하나라고 생각합니다.
1964년에 스물 네 살이었던 그 청년이 누구인지는 굳이 밝힐 필요는 없을 것이라 보입니다. 다만 피끓는 젊음으로 정의를 외친 한 청년이 노회하기 그지없는 노인이 되어, 자신이 외치던 정의와 정확히 대척점에 서있는 불의에 대하여, 한반도 내에서 그만이 가지고 있는 최고의 권력으로서 면죄부를 주고자하는 역설적인 상황이 펼쳐지는 곳이 바로 우리가 살아가는 이곳, 2008년의 대한민국입니다. 약관 스물 네살의 청년이던 시절의 그가 지금 바로 이 시대로 돌아온다면 이순을 넘어 종심에 다다른 자신의 모습을 보면서 어떻게 느낄지가 궁금합니다. 참으로 궁금하기 그지없는 일입니다.
현 정부의 지속적인 실정과 일국의 지도층으로서 한심하기 그지없는 작태들을 지켜보면서도 그저 울분만 내고있을 뿐인 저 자신의 현재를 종종 부끄럽게 돌아보게 됩니다. 세상을 알아가고 현실을 인식할 뿐이라는 미명 하에 작금의 불의를 방관하거나 세월만 축낸다면 아직은 이십대의 끝무렵에서 맴도는 저 또한 40여년이 지나면 제가 아는 바로 그 청년과 무엇이 다를까 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그렇게 나 스스로에게 부끄럽지 않은 삶을 살아가야 한다는 너무나 당연한 명제를 수행한다는 것 조차도 두려워지는 것이 지금의 대한민국을 살아가는 한 청년의 솔직한 심정입니다..
신임하던 심복의 총탄에 의해 술자리에서 사살된 후 지금은 경상북도 자기 고향의 어느 체육관 이름으로 남은 모 대통령이 군복을 벗으시던 날의 어록을 잠시 빌려서 말하자면, 다시는 이 땅에 그와 같은 불행한 청년이 나타나지 않기를 바랍니다. 정말 간절히 바라마지 않습니다. (*)
이올린에 북마크하기
이올린에 추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