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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8/05/01 2mb, 2달동안 무슨일이 한눈에 알기쉽게 쏘옥..!
  2. 2008/05/01 44년전, 어느 스물네살 청년의 이야기 (1)

2mb, 2달동안 무슨일이 한눈에 알기쉽게 쏘옥..!

Social 2008/05/01 1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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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대운하 추진
    - 전국민 여론 : 비등비등하다고 봄. 하지만..
    - 물류 운하가 점점 축소 관광운하로 변신 중 (귀에 걸면 귀걸이 코에 걸면 코걸이 식)
    - 운하의 본질은 사라지고 갈수록 이상하게 변해감 (어떻게든 파겠다는 것)
    - 청와대 입장 : 무조건한다..(안 할수 없겠지, 거기에 땅 사논게 얼만데!!)

2. 소고기 굴욕협상 및 조공협상
    - 협상국가중 유일하게 아무런 장벽없이 무조건 항복 협상.
    - 전국민 수입반대 여론 폭발
    - 주요 메이저언론(조.중.동)은 축산농가의 경제적 이유라는것으로 여론 회유정책 사용
    - 인터넷 등 온라인 언론에서 광우병 위험에 관한 여론 폭발적인 발생
    - MBC에서 PD수첩/아침방송등에서 심각하게 기술하기 시작함.
    - 청와대 입장 : 우선 해보고 시간을 두고 천천히 생각해보자. (다 죽고 생각해보자구?)
    - 긴급추가  : 얼마전 일본에 잘못배달된 소고기 원래 목적지는 한국이었습니다.
                      /지금 현재 수원 물류창고에 소고기 수입되어있다는 불확실하지만 신뢰성있는 정보.

3. 부자들을 위한 세금제도(종부세,상속세등) 폐지
   - 서민과 아무상관없는 종부세, 상속세 폐지
   - 직접세를 낮추고 간접세를 은근히 올리는 정책 남발
   - 간접세가 올라간다는것은 서민들의 등골에 빨대를 꽂아보겠다는 심산 100%
   - 간접세 상승시 기대효과 내수하강/ 물가상승.
   - 서민들 세금감면해준다고 좋아한다. 왜 당장에 직접세로 내는게 없으니까.. 하지만 두고봐라 살벌한 간접세의 위력을...

4. 의보 민영화
    - 끊임없이 반대여론에 부딪히면서도 계속 적인 물밑작업중
    - 메리츠 화재의 제일화재 인수등으로 외국계 보험회사들 국내 주요 보험사 공략 시작.
    - 가뜩이나 생명,종신 굵직한 보험 다 팔아먹고 새상품 개발해야 하는 보험사들에게 단비와 같은 정책
    - 온국민이 반대를 외치고 있음(상위 1%제외)
    - 청와대 입장 : 그래도 한다.
    - 최근 입장변경 : 2원화 하겠다.(그럼 건강보험은 의무로 무조건들고, 민간은 보조로 들던지 두개중에 선택은 절대 안된다.)

5. 사학법
    - 모든 교육입시제도의 후퇴
    - 과열경쟁 및 인성교육의 퇴보
    - 우리의 아이들은 이제 더더욱 공부하는 머쉰이 되어야함.
    - 이제는 공부잘해도 돈없으면 대학 문턱에 가기도 힘듬.(등록금 1천만원 - 과연 대학이 그정도 퀄리티의 교육을 하는지 의문)
    - 자립형 사립고의 추진 -> 대놓고 상류층은 우리가 계속 해쳐드시겠다고 공언하심
    - 자립형 사립고를 가기위해 아줌마들 엄청난 치마바람 예상.
    - 기타 여러가지 제도로 신분(?)간 계층이동 불가능하도록 고착현상 유도 (이게 목적!)
    - 결국엔 그들만의 세상이 될것임.(모 나라처럼 결혼이 하두 꼬여서 근친까지 될지도 모름)
 
6. 국민이 외국인 시위대(폭도)에 의해서 구타 및 사망하는 사건 발생
    - 많은 국민이 대중국 사과를 요청
    - 청와대 침묵 , 유감통상부 또유감표명
    - 형사 처벌 하지도 않고 중국으로 보냄.
    - 앞으로 우리 국민들 외국다닐때 조심해야 함. 자국내에서도 개무시 당하는데 외국이라고
      개무시 안당할까.
    - 중국曰 "한국은 이해해줄줄 알았다." 하긴 일본도 용서하는 한국인데~

7. 서울 뉴타운 추진
    - 오세훈시장에게 법을 바꿔서라도 관련부처를 국토해양부로 옮긴다고 까지 협박
    - 결국엔 하기로함.
    - 개념없는 서민들 콩고물이라도 떨어질거 같아 반기지만 실제는 국물도 없음.
       다 이제 밖으로 내몰림. 뉴스에 자살하시는 구민여러분들 다수 속출예상
       (집을 가진 사람은 콩고물 떨어질지 몰라도 정말 세입자들까지 반기는 이유를 도통 모르겠다. 그저 쫓겨날 뿐인데 왜 뉴타운이 되기를 고대하는지 말이다. 집 살돈들은 가지고 계신건가?)

8. 지방균형발전계획
    - 이것으로 인해서 지방의 땅값이 폭등했다고 하며 까댐(사실 오르긴 올랐음)
    - 계획폐기로 방향 전환하다가 지자체의 등쌀에 못이겨 조정안으로 바꿈(원래 이거 한나라당이 집중 요청한 정책아니었던가?)
    - 공공서비스 기업들 다 민영화 시켜 허울좋은 발전계획으로 만들어버릴 요량같음
      (민영화 이후 국가 기업도 아닌데 국가가 무슨 권한으로 가라마라하겠음?)
    - 결국엔 국민들의 반대를 무릎쓰고 계획을 파기하겠다는것으로 밖에 안보임
    - 결국엔 모두 서울로 서울로 해서 서울에 인구 2천만이상 모여살 듯. 이거 뭐 도시국가냐?

9. 대북외교
   - 이전 정부부터 왜 북한을 어르고 달래는지 모르냐? 끊임없이 추진되고있는 동북아 물류허브 프로젝트
      가. 아시안 하이웨이 / 나. 극동 대륙철도
      (이거 모르면 검색해보시길.)
   - 북한과의 긴장감 조성으로 전초적인 물류기지로서의 가능성을 확실하게 퇴보시킴
   - 동북아 물류 허브 조성시 우리나라는 앉아서 통행료만 받아도 상상을 불허할 매출 및 엄청난 일자리 창출로 많은 실업율을 해소할 수있음.
   -
추진의 가장 큰 문제는 북한. 북한과 긴밀한 협조체제만 이루어지면 남북이 앉아서 물류허브 기지와 기착점으로서
      앉아서 떼돈버는 결과를 가져올수 있음
   - 최근 일본이 동북아 물류허브의 출발지를 선점하고자 부산과의 해저터널 건설 제의함
   -
부산이 출발지가 됐을때와 일본이 출발지가됐을때는 출발지가 어디가 되느냐에 따라서 한국과 일본의 위치가 달라짐
      무슨말인지 모르면
     
http://cafe.naver.com/nextrealm.cafe?iframe_url=/ArticleRead.nhn%3Farticleid=24877 -> 읽어봐.
   - 이명박 대북긴장감 조성으로 그나마 잘 달래고 있던 북한 장난아니게 열받음. 대화단절 유도
   - 긴장감이 계속되는한 동북아 물류허브 장기간 보류
   - 동남아시아 다른나라에서 먼저 추진시 대한민국 100% 새 당첨

10. 부정부패 내각 형성
     - 내각에 입각하는 사람들마다 부정부패 장난 아니게들통남.
     - "일 잘하면 부패쯤은 눈감아줄수 있다." 비슷한 말도 안되는 발언
     - 국민들이 청와대 내각보면서 한숨만 쉬어댐. 국민들의 정치적 무관심 유도
     - 무능보단 부패라는 개념 탑재한 국민들도 잘못.
 
11. 영어몰입교육
      - 전국민이 영어를 잘해야 선진국이 되야 한다는 2MB의 말슴.(인수위시절부터.)
      - 때아닌 영어치맛바람 및 영어교사바람으로 전국이 영어로 넘실거림
      - 자국어인 한글도 못뗀애들이 영어잘하면 "오 똑똑하네~~" 하는 이상한 나라로 이동중
      - 자국어에 대한 자긍심이 없는지 미국 순방연설 영어로 지껄임.. (제대로 하지도 못했음 문법틀리고 난리아님)
      - 하지만 이정책 제대로 추친못해보고 보류 상태...
      - 언젠가 해버릴거 같음..
      (근데 영어 그렇게 잘하는 필리핀은 왜 그모냥이야? 국민소득은 높은데 왜 대학까지 나온애들이 동남아에서 파출부 생활을?)

12. 각종 친일청산위원회 사업 방해 및 예산 축소/ 합병
     - 과거사 위원회등 역사에 남은 마지막 숙제 친일청산 문제를 정부차원에서 사업방해
     - 한나라당 대부분이 친일바 후손임을 자기네들도 인정
     - 친일파 뉴라이트 소속원들의 국회의원 당선(이거 찍은 사람은 도대체 생각이 뭐가 있음?)
     - 최근 대통령 공식 발언 "우리가 용서했는데...."라는 발언으로 국민에게 허무함 선사.
     - 청와대에 도덕적헤이 및 친일청산의 의지 부재 명백하게 표명
     - 일본 순방시 일왕에게 "천황" 이라는 호칭사용.. (일본국민임을 인정..한건가?.....)

13. 실용주의적(?) 정책 남발
     - 해외유스 인재를 활용키 위해 이중국적 허용 검토 (사학법으로 계급만들고, 이중국적으로 병역 피하겠다는 말)
     - 국책공사시 문화재 조사기간 140일에서 40일로 축소 (청계천할 때 많이 까여서 그런 거 같음. 이번엔 뭘 불태우려고 그러시나?)


출처 : 디브디프라임에서 약간 필자가 수정-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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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4년전, 어느 스물네살 청년의 이야기

Social 2008/05/01 02: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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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16 쿠데타로 집권한 우리나라의 모 육군 소장이 1963년 직선제를 통해 대통령이 된 이후 가장 먼저 시도한 것이 대한민국 정부 수립 후부터 단절되어있던 일본과의 국교 정상화였습니다.
  일본은 1952년의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을 통하여 세계 제2차 세계대전의 패전국으로 미국을 비롯하여 서구 승전국들에게 전쟁책임을 인정하고 사죄와 배상을 약속한 상태였습니다만, 한국과 중국을 비롯한 아시아 국가들에 대한 침략사실에  대해서는 책임을 인정하기를 거부했고, 당연히 배상문제도 언급되지 못했습니다. 
 
당시 한국 전쟁에 휘말려 있던 한국은 말할 것도 없고 중국 또한 꽤 입장이 매우 곤란한 처지였습니다. 중국 본토에서 쫓겨나 겨우 상임이사국 지위를 유지하던 대만의 국민당과  본토의 중국 공산당 정부 모두 분열로 인해 승전국임에도 제 목소리를 내지 못했습니다. 특히 제2차 국공내전 승리 직후에 한국전쟁에 참전하고 있던  중국 공산당 정부는 당시 국제사회에서 대만의 국민당 정부에 밀려 중국 본토의 공식적인 정부로 인정받지 못하고 있었기에 샌프란시스코 조약에 외교적 항의조차 제대로 못했습니다. 그렇게 일본은 아시아 각국에 대한 전쟁범죄에 대한 부분에서는 면죄부를 받은채로 다시금 국제사회에 편입하게 된 것입니다.
  경제개발계획을 추진하고자 했던, 만주 주둔 일본 관동군 소속 장교 출신의 이 대통령은 그에 소요되는 막대한 비용을 충당하기 위해 한일국교정상화를 생각했다고도 전해집니다만 이보다는 또한 동북아시아의 안정과 한일간의 안보협력을 통해 중국과 소련을 견제하는데 골몰했던 미국과 이해관계가 맞았던 것이 더 큰 이유로 보입니다. 사실 1950년의 한국전쟁 발발 이후 공산주의 확산을 막기위한 자본주의 진영의 최후 방어선으로서 한국과 일본이 위치한 극동이 꼽혔고 그런면에서 동북아시아에서 자국 세력의 강화를 추구하는 미국에게 있어서 한국과 일본의 파트너십 구성은 매우 매력적인 부분이었습니다. 미국은 본래 이승만 정권 시절부터 한일 국교수립을 요구했었으나 보수적이나 비타협적 민족주의 경향의 이승만의 강한 반대에 부딪쳐서 답보상태였던 실정이었습니다. 그런만큼 쿠데타로 집권하여  정통성에 큰 약점을 갖고 있었던 당시 한국의 군부출신 신정부의 집권은 미국에게 있어서는 호재나 다름없었지요. 또한 한국전쟁이라는 경제적 호기를 활용하여 54년부터 57년까지 거듭된 진무((神武 )경기를 통해 전쟁의 후유증을 털어내고 고속 성장을 거듭하고 있었던 일본 또한 대규모 상품시장으로서 한국 진출을 간절히 원하고 있었던 실정이기도 했습니다.
  이러한 시기 대통령의 지시로 신정부 권력의 핵심이었던 김종필이 전권을 가지고 한일 수교 회담에 나서게 되었습니다. 그는 일본측 대표 오하라와 협상을 진행했는데 예상보다 훨씬 더 양국 간의 이해관계가 엇갈린 탓에 협상은 해를 넘기게 됩니다. 그 중에 가장 갈등이 심했던 분야가 바로 독도 영유권 문제였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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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까지도 인구에 회자되는 김종필-오하라 메모, 특히 협상과정에서 문제가 되는 독도를 아예 폭파해 버릴까라고 물었다고 전해지는 김종필의 발언은 진위여부를 떠나서 독도이야기가 나오면 항상 등장하는데, 무서운 것은 협정문서가 민간에 공개된 지금도 김종필-오하라 메모라 불리는 독도 영유권과 관련한 문제는 아직 전문이 확인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역사가에 따라서는 이 때 김종필이 비공식적으로 합의한 사항 중 대한민국이 독도영유권을 주장하는데 심각한 제약이 있는 조항이 있었으며 바로 이 조항을 통해 일본정부가 수십년간 독도문제를 놓고 국제재판소에 대한민국 정부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하는 근거가 된다는 이야기를 합니다.
 
이 시기 일본으로부터의 어떠한 사과나 배상도 없는 상태로 일제에 의한 식민통치의 불행한 경험을 고스란히 겪은 바 있던 대한민국 국민들은 당시 대한민국 정부의 국교정상화시도를 굴욕외교로 규정짓고 전국민적인 협상 반대운동을 펼칩니다.
 
1964년 6.3일, 분노한 국민들이 거리로 나섰습니다. 훗날 6.3운동이라고도 불리는 이 대규모 군중집회는 서울 소재 대학생들이 주도하였습니다. 당시 이 운동의 주모자로 지목되어 내란소요죄의 명목으로 체포된 사람들 중에 고려대 상대 학생회장을 맡고 있던 스물 네살의 청년이 있었습니다. 서대문 형무소에서 6개월여를 복역한 이 청년은 징역 3년, 집행유예 5년을 선고받은 후에야 풀려났습니다
 
그가 감옥을 들락거리는 시기였던 1965년 마침내 한일국교가 수립되었습니다. 대한민국 정부는 모두 무상 3억달러의 "독립축하금"과 경제협력 자금의 명목으로 유상 3억달러, 그리고 2억달러의 상업차관을 알선할 수 있도록 지원받고 일제강점기동안 일본이 조선에게 가했던 모든 피해와 1931년 만주사변으로부터 시작되는 일제의 전쟁기간동안 조선인을 강제동원한 전쟁범죄에 대하여 식민지 침략행위에 대한 어떠한 책임도 묻지 않겠다는 협정문을 체결하게 됩니다. 이는 평화선(어족자원보호선) 철폐, 독도문제 회피, 징용·징병·정신대·원폭 피해자 보상 회피, 징용·징병자의 강제 저축금 반환 불청구, 문화재 반환 포기, 재일동포 법적 지위 보장 포기가 전제된 것이었지요. 그나마 일시불도 아닌 10년 지급에 대한민국 정부는 동의했습니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그나마도 전쟁 혹은 피해 배상금이 아닌 독립축하금의 명목이었다는 것입니다. 어떠한 명목의 공식적 사과 성명도 없었습니다. 그나마 무상 3억달러는 상당부분 현물로 지급된 것이나 다름 없는 것이 경제개발 과정에서 일제 플랜트 등을 독점적으로 도입해야한다는 조건이 포함된 "계약"이었습니다. 이는 3년간 식민통치를 겪었던 필리핀이 일본으로부터 무상으로 5억5천만달러의 전쟁배상금과 2억 5천만 달러의 유상차관을 받아낸 것과 비교하면 엄청난 차이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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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참고로 이 시기 한일협정을 일정까지 조정하면서 주도했던 미국 CIA보고서에 따르면 대략 61년부터 협정이 종결되는 65년까지의 4년간 군정에서부터 집권공화당에 이르는 군부 집권세력에게 일본의 6개 대기업으로부터 약 6600만불의 정치자금이 유입되었습니다
 
한일협정 반대를 외쳤던 그 청년은 당시 이러한 굴욕적인 협상결과를 보면서 무엇을 느꼈을지 아직까지도 궁금하기 그지없습니다. 그로부터 몇 년간 그의 행적은 꽤 정확히 알려져있습니다. 대학을 졸업했지만 시위운동주도 경력으로 그 어떤 곳에서도 취직할 수 없었던 그 청년은 자신의 반정부 운동경력에 대해 스스로 변호하면서 국가 경제발전을 위한 역군으로서 일하겠노라는 강력한 의지를 내보인 청원서를 청와대에 넣었습니다. 당시 대통령이 이 청년을 얼마나 갸륵히 여겼는지는 아직 알 수 없습니다만 아무튼 그러한 과정을 통하여 사회진출이 허용된 이 청년은 건설회사가 주력이던 모 중견기업에 입사하게 됩니다.
 
여담입니다만 그 때의 청원서를 기억하고 있던 당시 대통령이 이후 청와대를 방문했던 그 중견기업의 오너에게 문득 그의 근황과 안부를 물었다고 합니다. 건설사의 오너는 이 청년을 전혀 모르고 있었으나 청와대에서 돌아온 직후 대한민국 제1의 권력자와 안부를 묻고 지내는 사이로 여겨진 이 청년을 즉각 사장실로 불러올렸다고 하지요.
훗날 입사 5년만에 이사, 12년만에 사장자리에 올랐다는 이 청년의 신화는 여기서 시작됩니다. 지금 그는 자기가 청원서를 보낸 수신지였던 바로 그 집에서 살고 있습니다.

 
며칠 전의 일입니다. 스물네살의 젊음으로 굴욕적인 한일국교정상화 반대를 외쳤던 바로 그 입이 예순여덟이 되자 "우리가 일본도 용서하는데, 친일 문제는 공과를 균형있게 봐야 한다"라고 했다고 하네요. 사실 그간 한일 역사를 되돌이켜 본다면 우리 쪽에서 아무도 용서한 기억이 없을 뿐더러, 또한 그 쪽에서도 용서를 청한 사례가 없는데 말입니다.
 
피끓는 청춘이 40년을 넘기면 기억이 가물거릴 수도 있겠습니다. 한 사람의 인간이 40년간 같은 생각과 뜻을 가지고 그 자리에 머문다는 것이 더 현실성이 떨어지는 이야기겠지요, 다만 피끓는 청춘을 바쳐 민족과 조국의 정의를 구현하고자 했던 한 청년이 이처럼 극적으로 변하여 같은 입으로 정반대의 다른 말을 내뱉을 수 있다는 것 또한 20세기 한국 현대사가 가지는 비극 중 하나라고 생각합니다.
 
1964년에 스물 네 살이었던 그 청년이 누구인지는 굳이 밝힐 필요는 없을 것이라 보입니다. 다만 피끓는 젊음으로 정의를 외친 한 청년이 노회하기 그지없는 노인이 되어, 자신이 외치던 정의와 정확히 대척점에 서있는 불의에 대하여, 한반도 내에서 그만이 가지고 있는 최고의 권력으로서 면죄부를 주고자하는 역설적인 상황이 펼쳐지는 곳이 바로 우리가 살아가는 이곳, 2008년의 대한민국입니다. 약관 스물 네살의 청년이던 시절의 그가 지금 바로 이 시대로 돌아온다면 이순을 넘어 종심에 다다른 자신의 모습을 보면서 어떻게 느낄지가 궁금합니다. 참으로 궁금하기 그지없는 일입니다.
 
현 정부의 지속적인 실정과 일국의 지도층으로서 한심하기 그지없는 작태들을 지켜보면서도 그저 울분만 내고있을 뿐인 저 자신의 현재를 종종 부끄럽게 돌아보게 됩니다. 세상을 알아가고 현실을 인식할 뿐이라는 미명 하에 작금의 불의를 방관하거나 세월만 축낸다면 아직은 이십대의 끝무렵에서 맴도는 저 또한 40여년이 지나면 제가 아는 바로 그 청년과  무엇이 다를까 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그렇게 나 스스로에게 부끄럽지 않은 삶을 살아가야 한다는 너무나 당연한 명제를 수행한다는 것 조차도 두려워지는 것이 지금의 대한민국을 살아가는 한 청년의 솔직한 심정입니다..
  신임하던 심복의 총탄에 의해 술자리에서 사살된 후 지금은 경상북도 자기 고향의 어느 체육관 이름으로 남은 모 대통령이 군복을 벗으시던 날의 어록을 잠시 빌려서 말하자면, 다시는 이 땅에 그와 같은 불행한 청년이 나타나지 않기를 바랍니다. 정말 간절히 바라마지 않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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