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낯선 즐거움 - 하나

Hallo, Kino! 2008/03/09 02: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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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찬욱 감독의 복수 3부작은 획일적이다. 물론 다루고자 하는 복수나 이를 표현해내는 방법이 모두 다르긴 하지만, 결국 길은 올곧고, 종착지는 묻지 않아도 알 수 있다. 방식이 어떻게 되었든 복수는 이루어지고, 관객들은 유혈이 낭자하는 스크린을 볼 수 밖에 없다. 사실 관객들은 이러한 것을 바란다. 방식이 박찬욱 식이든, 타란티노 식이든 간에 화끈하고 권선징악이 뚜렷한 복수극을 보고자 스크린 앞에 모여드는 것이다. 우리가 생각하는 복수극은 이렇다. <복수는 나의 것>이나 <올드보이>, <친절한 금자씨>로 대표되는 박찬욱 식 복수극이나 <킬빌>이나 <소림 18동인>과 같은 고전적인 복수극, <맨 온 파이어>나 <본 아이덴티티>와 같은 복수극 등 언뜻 생각해보면 다양한 복수의 종류가 있지만 다시금 생각해보면 하나 같이 똑같다. 방식이 다를 뿐이지 결국 그들이 행하고자 하는 바는 같다는 것이다. 자신의 소중한 사람을 누군가에 의해 잃고 이를 응징키 위해 모험을 떠나고, 그리고 끝내는 이를 응징하는 것이 복수극이 아닌가?
  복수극의 역사는 인류의 역사와 함께 해왔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하지만 복수극의 틀은 크게 변하지 않았다. 고전 <장화홍련>의 복수와 <친절한 금자씨>의 복수는 평행선을 달리는 것 처럼 보이지만 끝 점엔 결국 만난다. 다른 길을 택하고 있을 뿐 결론은 같다는 이야기다. 수많은 세월이 지나오면서 복수극은 나름 발전에 발전을 거듭했지만 기본적인 틀은 결국 벗어나지 못했다. 하지만 이를 관객이 원했고, 그렇게 때문에 생산되었다는 점에서 창작자들이 돌을 맞을 필요는 없다. 이게 수요와 공급의 법칙이 아닌가?
  그렇기에 <하나>는 관객들에게 낯설고 불편한 시간이 될 수 있다. 수요와 공급의 법칙을 완벽하게 위반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특색있는 복수극은 애초부터 공급이 되질 않았다. 그리고 수요가 존재하는지도 불분명했다. 관객들은 복수극의 기본적인 틀을 비틀어버린 작품이 나오길 기대하지 않았다. 어찌보면 무모한 짓이다. 수요없는 공급은 맨 땅에 헤딩하기와 별반 다를 바 없다. 하지만 의외로 <하나>는 제법 먹혀들어갔다. 이러한 수요가 없었던 것이 아니라 숨겨져왔었던 것이다. 관객들은 끊임없이 새로운 것을 원했고, 그리고 이를 갈망해왔지만, 이러한 방식의 복수극은 차마 생각해내지 못한 것이다. 그렇기에 요구를 할 수 없었고, 그동안 복수극은 공장에서 찍어내듯 비스무레한 것들만 난무할 수 밖에 없었다.
  기존의 복수극들과는 다른 노선을 가지고 있는 <하나>의 기본 틀은 수讐를 수酬로 행하는 것이 아닌 수粹로 대하는 것이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는 함무라비 법전에서 아직 벗어나지 못한 여타 복수극들과는 달리 순수하고 유쾌한 복수를 이끄는 <하나>는 정말 포스트 모더니즘에 걸맞는 복수극이라 할 수 있다. 물론 앞서 언급한 함무라비식 복수극 뿐만이 아니라 원수를 사랑하게 되는 것과 같은 이색적인 작품들도 그간 몇 있었으나, 복수 자체를 이렇게 뒤틀어 버린 작품은 드물다. 지금까지의 복수극이 복수를 성공하고 못하고의 두 가지 선택문만 있는 객관식 문제였다면, <하나>는 이를 복잡하게 꼬아버린 서술형 문제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복수는 사람이 유일하게 누릴 수 있는 권리이고, 또 이를 즐겁게 지켜볼 수 있는 게 관객의 권리인데, 지금까지 우리는 너무 단순한 레시피로 복수라는 소재를 요리해오지 않았나 싶다. <하나>가 갖는 의미는 바로 여기에 있다. 복잡, 오묘, 유쾌, 순수, 발랄 기타 등등 수만가지 재료가 들어가는 복수극. 아직은 낯설지 몰라도 우린 이에 열광하고 스크린 앞에 몰려들게 되는 날이 언젠가는 오게 될지 모른다. 사실 낯설기 때문에 더욱 즐거운 게 아닌가? 새로운 즐거움의 시작. 다들 이렇게 시작하지 않았나 싶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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